정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들으리라곤 생각 못했던 단어였습니다. 바로 ‘환단고기’, ‘환빠’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2일 열린 공개 업무보고 자리에서, 박지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을 상대로 “그, 이 역사교육 관련해서 무슨 환빠 논쟁 있죠?”라고 질문합니다. ‘환빠’로 시작한 문답은 고대 역사 연구에 관한 문답으로 이어졌고, 역사 연구에서 문헌 사료를 중시한다는 박 이사장의 답변에 이 대통령은 “환단고기는 문헌이 아니에요?”라고 다시 물었습니다(문답 전문).
주말 내내 화제가 되고 있는 환단고기는 1979년 출간된 책의 제목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환국’이란 이름의 국가가 유라시아 대륙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지도를 보신 분이 있으실 겁니다. 바로 기원전 6만 년 전(혹은 기원전 7000년 전) 우리 민족이 환국을 세워 세계 문명사에 영향을 줬다는 환단고기 내용 중 일부를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자세한 내용을 모두 다룰 순 없지만, 환단고기는 '환국'을 비롯한 내용부터 사용한 용어, 인용 사료 등 다양한 근거를 통해 일관되게 위서로 평가 받고 있으며, 한국 유사역사학의 대표적 사례로 꼽힙니다.
14일 대변인 브리핑에서도 환단고기 관련 질의가 쏟아지자, 대통령실은 브리핑 직후 “대통령의 환단고기 관련 발언은 이 주장에 동의하거나 이에 대한 연구나 검토를 지시한 것이 아니”라며 출입기자단에 공지했습니다. 하지만 당분간은 관련 논쟁이 이어질 전망입니다.
환단고기 논쟁은, 내용적으로는 세계 문명의 시발점이자 광대한 제국의 후손이라는 그릇된 민족주의를 유도한다는 점에서 우려를 낳습니다. 그리고 이에 더해, 정치적으로는 유사역사학이 가진 비합리적 논리나 위험성이 아니라 정치적 지지 그룹에 따른 찬반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 역시 우려스러운 부분입니다.
정치적 지지 그룹에 따른 찬반 논쟁으로 귀결된다는 것은, 환단고기에 대한 입장을 곧 정치적 입장으로 확장해버리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미 소셜미디어에서는 그런 뉘앙스의 메시지들이 보이기 시작하는데요. 즉, 환단고기를 부정하면 뉴라이트 사학에 동의하는 사람,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 말이죠. 마침 업무보고에서 이 대통령에게 질문을 받았던 박지향 이사장은 뉴라이트 성향의 행보로 논란이 많았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환빠’라는 멸칭이 널리 퍼진 것이 방증하듯 유사역사학에 대한 대중적 이해가 낮지 않기 때문에 진영 논리로만 전개될 경우 대통령과 여권에는 되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됩니다.
끝으로, 이런 유사 이론 또는 사이비 논리들이 여전히 공적 영역 복판까지 침투하고 있다는 사실은 꼭 돌아봐야 합니다. 유사 이론들은 사료나 과학적 연구 결과처럼 일반 대중이 직접 검증하기 어려운 자료를 조작, 왜곡하고, 이를 ‘주류 논리에 맞선 용기 있는 진실’로 포지셔닝, 민족 자긍심이나 집단적 분노 같은 감정을 자극하곤 합니다. 황우석 사태가 보여줬듯 강한 신념에 올라탄 주제는 공적 영역에서 토론조차 어렵게 만들죠. 포퓰리즘 열풍 등 정치가 감정 동원에 의존하는 경향이 심화되는 요즘, 유사역사학뿐 아니라 각종 비과학적 신념들이 정치 공간을 잠식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계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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